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말을 자라면서 숱하게 접했고, 그것을 생각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의 성적인 지향성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고, 기왕이면 대세를 따라 이성애자로 살아보겠다고 버텼다. 그것은 실은 미움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 싫어 웅크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동성애자임을 받아들이고 사는 지금의 나는, 여러 생활상의 불편함은 있을지언정 훨씬 나답게 살고 있다고 느낀다. 혐오의 말이 나를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겨우 한 집단에 대한 혐오를 넘어섰을 뿐이다. 이미 사회에 흩뿌려진,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의 언어를 여전히 생각 없이 탑재하고 있었다. 5월 8일에 참석한 HIV/AIDS 오픈테이블은 그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HIV 감염의 원인이 "무분별한 섹스"라고 생각했다. 오픈테이블 첫 순서로 HIV/AIDS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을 적어보라고 해서 저 단어를 적었다. 다른 참가자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무분별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혹시 지금 참가자님은 누군가와 섹스를 하고 있다면 무분별하게 하고 있는가, 등등의 질문이 들어왔다. 질문을 받고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게. 그러면 분별력 있는 섹스란 무엇이지? 한 사람하고만 하는 걸 말하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그 유일한 파트너가 자기도 모르게 감염되었다면 난 분별력 있게 섹스를 했음에도 함께 감염되는 건가?’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분별력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파트너가 누군들 내가 그의 모든 과거를 알 수도 없었고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분별한 섹스를 하는 사람, 그리고 그 결과로 HIV에 감염되어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 이것은 내가 머릿속에 갖고 있던 허상이었다. 무분별한 섹스가 HIV 감염의 필연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애초에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무분별하다는 말 속에는 PL(HIV 감염인)들을 탓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분별할 수 있었는데 왜 안 했냐는 비난이 들어 있다. 그러면서 HIV 감염이라는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한다. 왜냐면 나는 분별력이 있으니까. 그리고는 PL들을 일상에서 배제한다. 배제를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혐오의 패턴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PL들을 향한 혐오의 한 끄나풀을 확인했다. 오픈테이블을 여러 차례 거치고,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동료 참가자들 덕분에 이를 수정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주입된 허상을 폐기하고 새로운 사실을 업데이트했다. PL들은 표현 그대로 HIV/AIDS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People Living with HIV/AIDS)일 뿐이었다. 필요한 약을 챙겨 먹는 정도의 번거로움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내용만 다를 뿐, 나도 다른 종류의 PL—동성의 연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Person Living with same-sex partner)—이다. 나의 지향성을 때로 누군가에게 숨겨야 하는 정도의 번거로움이 있을 뿐이다.
약자, 소수자, 피해자를 비난하고 이들이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인 양 바라보는 것은 손쉽고 비루하다. 훌륭한 사람은 못 돼도 비루하게 살지는 말자고 늘 생각한다. 나의 비루함을 발견하는 작업은 언제까지고 계속되겠지만, 이 작업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오픈테이블을 통해 하게 되었다.
책읽당 당원 / 플로우